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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파룬궁 탄압

작성자구도중생

작성일2020-01-06

조회수10,791









중국대륙의 "살아있는 사람에서 장기적출"




















中 전 보건부 장관 “장쩌민 전 주석이 장기 적출 지시했다”



중국 인민 해방군 군수과 바이슈중(白書忠) 전 보건부 장관.


장쩌민이었다. 바로 그가 장기 적출을 지시했다 - 중국 인민 해방군 군수과 바이슈중(白書忠) 전 보건부 장관

중국 내 인권을 조사 중인 이들에게 비밀스럽게 녹음한 통화 한 건이 한 줄기 빛이 될 전망이다.

중국 공산당(중공) 전 간부가 누가 믿음을 견지하는 사람들에 대한 학살을 지시했는지 대답했다.

2000년 중국 장기 이식 산업에 상당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장기 이식률이 급속도로 증가했고, 새로운 이식 센터가 문을 열었으며, 중요 장기 이식이 1주일 내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선전하는 웹사이트가 홍수를 이뤘다. 간과 심장 이식을 위해 수년이나 기다려야 하는 것이 일반적인 선진국에서는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상황이다.

장기를 둘러싼 미스터리

얼마간 이 상황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다른 선진국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중국에는 자발적인 기증 이식 체계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이식용 장기는 감옥에 갇힌 사형수들을 대상으로 진행된 것으로 알려졌었다. 중국에서는 이러한 장기가 쉽게 적출돼 팔렸다.

하지만 이식률과는 달리 사형 집행률은 2000년 이후 갑자기 증가를 멈췄다. 중국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인권 운동가들의 모임인 두이하(Duihua)의 정보에 의하면 지난 몇 년간 오히려 사형 집행 수치가 감소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2006년과 2007년부터 연구가들은 갑작스러운 이식 증가의 원인을 찾아냈다.

2000년 새로운 장기의 출처가 인터넷에 등장한 것이다. 그 장기들은 바로 영적 수행을 하는 파룬궁 수련자들의 것이었다. 명상과 도덕적 가르침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 고대 수련법인 파룬궁은 1990년대에 엄청난 유명세를 얻었다. 하지만 1999년 7월, 그 시기 중국 공산당 지도자였던 장쩌민은 이 활동을 폭력적인 방식으로 뿌리 뽑을 캠페인을 시작했다. 너무나 빠른 시간 동안 급속도로 그 인기를 얻었던 파룬궁이 당에 위협이 된다고 여긴 것이다. 그는 이 단체를 박해하는 일이 공산당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더욱 굳건하게 할 것이라고 믿었다.

병원 수치, 목격자들의 증언, 비밀 전화 녹취, 혈액 검사 등을 기반으로 파룬궁 박해 조사원들은 2000년 파룬궁이 중국 이식 분야에서 유용하고 중요한 장기의 출처가 됐음을 확인했다. 장기 이식 병원의 거대한 증가와 인간 장기 거래 붐은 파룬궁 수련자들의 장기가 있어 가능했다. 일부 장기는 외국인들에게 1억 이상의 가격에 판매되기도 했다.

이러한 증거와 더불어 계속 제기되는 의문은 바로 이러한 상황이 중국 내에서 빠르게 퍼져나간 이유가 지방 사업의 목적이었는 지 상부에서 내려온 지시 때문인지에 대한 것이다.

명령인가? 장기를 위한 살인인가?

서면 증거 부재로 언제나 가장 중심에 서 있던 주제는 그 과정이 ‘장기를 위한’ 것이라는 내용이 되어왔으며, 이 신랄한 표현은 파룬궁 수련자들을 대상으로 한 장기 적출에 얽힌 의문점을 다룬 ‘학살(The Slaughter)’의 저자인 에단 구트만이 처음 사용했다. 하지만 이제는 고위급 중국 군 간부 한 명이 사실은 돈을 목적으로 빠르게 퍼져나간 것이 아니라 파룬궁 수련자 수만 명을 대상으로 한 살해 및 장기 적출이 상부에서 내려온 지시였다는 것을 솔직하게 답하는 통화 녹취가 공개됐다.

바로 장쩌민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간부는 바로 그가 장기 적출을 시작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중앙 군사 위원회장이 신장 판매와 수술에 관한 지시를 내리는 것을 들었다고 반복해 말했다. 이 통화에서 바이슈중(白書忠)은 그의 수사관이 ‘연합 군수과에서 파룬궁 수련인들의 대부분을 살아있는 기증자로 사용한다는 것이 사실인가?’라는 말을 들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아마도 적어도 나는 그 시기에 장쩌민이 명령을 내린 후 모두가 많은 반(反) 파룬궁 활동을 진행했던 것으로 기억한다”며 “우리는 군사 의과 대학을 직접 관리했고, 그들은 인민 해방군 군수과와 바로 연계돼 있었다. 그 시기에 장쩌민은 이 문제에 상당히 많은 관심을 쏟고 강조에 강조를 거듭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반복된 명령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수화기 반대편의 상대가 “누가 이 문제에 강조에 강조를 거듭했나?”라고 묻자 바이슈중은 “장쩌민이다. 그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시기였다”고 답한다. 통화는 몇 분 동안 더 지속된다. 목소리는 틀림없이 중국 인민 해방군 군수과 전 보건부 장관인 바이슈중의 것이다. 잘 알려진 군 관계자였기에 그의 연설이 담긴 영상들은 인터넷에서 확인함으로써 비교할 수 있다. 녹취본의 목소리와 그의 목소리가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조사를 위한 게릴라전

게릴라 조사팀이 그와의 통화를 성공하고 이토록 예민한 정치적 정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방식은 또 다른 문제이다. 이 통화는 뉴욕을 기반으로 하는 국제 파룬궁 박해 조사 기구의 대변인인 왕지유안과 그의 팀이 주도했다. 이들은 기자가 통화를 실제로 진행한 개인과 이야기를 나누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통화한 이의 신원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왕은 그 사람이 중국 내에 있었는지 밖에 있었는지도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사용한 방식은 여러 해를 거치며 발전했으며 마침내 이들에게 정보를 흘려 줄 동정심으로 가득 찬 중국군 내부 인사들의 도움으로 빛을 발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특히 이 상황의 경우 전화 통화를 진행한 사람이 이 문제를 조사하고 있는 중국 고위 간부인 척 연기했다. 바이보다 더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으로 그가 꼭 질문에 대답했어야 하며 두려워하는 이를 말이다.

하지만 왜 그가 목소리의 차이를 인지하지 못했을까? 왕은 중국에는 많은 고위급 간부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서로 만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한다. 그는 자신들이 대상에 대해 조심스럽게 정보 조사를 진행했으며 그들인 척 가장했다. 실패하는 날도 있었고 대상이 의심을 품기 시작하며 전화를 끊기도 했다.

반면 자유롭게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존재했다. 만약 왕이 녹취 진위성을 의심받는다면 그는 국제 법정에 회부하거나 다른 기관의 상세한 통화 기록을 통해 실제로 이 전화가 연결되었고 그 번호까지 공개할 의향이 있다. 그는 또 다른 통화들의 경우 중국 내 공식 교환원에 연결하는 것까지 성공했다고 말한다.

그는 국제 파룬궁 박해 조사 기구가 현재 같은 기술을 다시 사용할 가능성을 망칠 수 있다는 이유로 이러한 정보를 발표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만약 내가 이 상황을 지어낸 것이라면 바이슈중이 직접 우리의 주장이 잘못된 것이라고 밝히지 않겠는가? 어려운 일도 아니고 매우 간단한데, 왜 모두 조용한가?”라고 주장했다.

‘엄청난 살인자’

공산당의 현 지도자인 시진핑은 지금 당 기구 및 군 내의 대대적인 축출을 진행 중이며, 그 대상의 대부분이 장쩌민과 연관이 있는 인사들이라는 사실은 매우 자명하다. 그렇기에 이들이 장쩌민에 관해 이야기하는 군 조사관에게 질문을 받는 상황을 자연스럽게 믿고 있다.

이러한 유도 신문의 방식은 데이비드 메이터스와는 잘 맞지 않았다. 그는 캐나다의 인권 변호사로 파룬궁을 대상으로 한 공산당의 장기 적출에 대해 주목할만한 보고서와 책을 출판했다.

그는 전화 인터뷰에서 “물론 그럴듯하나 검증 가능한 정보는 아니다. 사람들의 흥미를 위한 내용일 뿐이다”며 “개인적으로는 장기를 위해 파룬궁 수련인들을 살해하고 있다는 증거가 상당히 설득력 있다고 생각하며 모든 사람이 장쩌민이 파룬궁을 대상으로 하는 박해를 시작했다는 공공 기록까지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메이터스는 통화 자체로는 이러한 범죄가 일어났는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지만, 무엇이 이러한 상황을 만들었는지에 대해 보여주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하며 이를 암시적이고 비판적이며 혼자로는 부족하다고 여겼다.

그는 장쩌민이라면 그의 성격으로 보아 충분히 그러한 지시를 내리고도 남았을 것이라며 그는 ‘엄청난 살인자’라고 지적했다.


<중국 사스 내부고발자, 中 군대 장기적출 만행 폭로>

화이웨이 박사, 임종 전 불법 장기적출 만행 배후로 쉬차이허우 지목

중국 당국의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발생 은폐를 2003년 폭로해 세계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한 중국인 의사가 또다시 중국의 어두운 비밀을 들고 나왔다. 군 외과전문의였던 장옌융(蔣彥永·80) 씨는 중국 군(軍)병원들이 수감자의 장기를 적출하는 데 참여했고, 일부는 희생자들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장기가 적출됐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장옌융은 홍콩 케이블 TV와 인터뷰에서 “중국서 제공되는 (이식수술용) 간은 대부분 사형수 몸에서 적출된 장기다. 그 당시 어떤 법도 없었다. 우리는 죄수를 처형하고 있었다. (죄수) 가족의 동의 여부와 상관없이, 죄수들이 죽자마자 그들의 장기들을 적출했다. 가족이 동의하든 말든, 죄수들이 죽자마자 장기들을 적출했다”고 말했다.

장 씨는 “어느 정도로 이루어졌는가 하면, 301 군병원의 처형 장소에 구급차와 외과 의사 한 무리가 갔다. 죄수가 총살되자마자 외과 의사들이 작업에 착수했다”고 덧붙였다. 301 군(軍)병원은 중국 전군 최대 규모의 종합병원으로 베이징(北京)에 있는 인민해방군 총병원을 지칭한다.

의사들이 장기가 신선할수록 좋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수감자를 상대로 한 장기 적출은 돈을 목적으로 사악한 방식으로 자행됐다.

살아 있는 육신

장옌융은 “이식수술을 위한 간은 혈액순환이 중단된 시간을 최소화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죄수를 죽이자마자, 혈액 순환은 멈춘다. 그래서 시간상 공백이 길면 간의 기능과 생존율은 낮아진다”고 설명했다. 관리 감독이나 윤리적 점검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예견된 일은 발생했다.

장옌융은 “그들은 죄수들을 총으로 쏜다. 하지만 그들은 완전히 죽지 않은 죄수들을 바로 끌어당겨, 그 자리에서 장기를 하나둘 적출하기 시작해 한쪽에 놓아둔다. 이것이 그들이 하는 방식이다”고 말했다.

장옌융은 2003년 중국 공산당(이하 중공) 관료집단이 은폐한 사스(SARS) 발발을 처음 외신에 폭로했다. 그가 이번에 밝힌 중국군의 장기적출 만행에 대한 폭로 역시 중국 내 한 개인의 행보로는 극히 이례적이다. 그는 홍콩 방송 진행자와 인터뷰에서 15분 동안 등장한다. 더욱 이례적인 것은 장옌융이 현재 재직 중인 한 군전문의의 이름을 거론하며 그의 범행을 지적했다는 점이다.

장옌융의 발언은 많은 조사관이 수년 동안 조사를 거쳐 내린 결론이 대부분 사실임을 보여준다. 군병원들은 사형수들과 양심수들로부터 장기를 척출한 주요 기관이었다.

조사관들 가운데 특히 에단 구트만 미국 저널리스트와 데이비드 킬고어 캐나다 전 아․태담당국무장관과 데이비드 메이터스 캐나다 인권변호사는 조사 결과,

지난 15년 동안 중국의 장기 주요 출처가 파룬궁 수련자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파룬궁(法輪功)은 진선인(眞善忍)을 근본으로 삼는 중국 전통 심신수련법이다.

장옌융은 장기적출 희생자로 사형수들을 언급하긴 했지만, 장기가 적출된 사람들의 신원을 언급하지 않았다.

장옌융은 멘토였던 인민해방군 고(故) 화이웨이(華益慰) 박사의 유언을 존중해 중국군의 장기적출 만행 사실을 폭로하게 됐다고 말했다. 화이웨이 박사는 후진타오 전 중국 국가주석이 헌정한 조각상이 베이징 군총병원 마당에 세워져 있을 정도로 중국서 존경받는 인물이다.

우리는 죄수들을 처형하고 있었다.
(죄수) 가족의 동의와 상관없이, 죄수들이 죽자마자 그들 몸에서 장기를 적출했다

군 범죄자들

장옌융이 말한 바로는, 화이웨이가 2006년에 숨을 거두기 전, 그는 장옌융에게 인민해방군의 불법 장기 적출 만행을 폭로하고 장기적출에 참여한 군 외과전문가 리시융이라는 것과 쉬차이허우(徐才厚)가 그를 보호해준 정치인이라는 사실을 밝혀달라고 부탁했다.

쉬차이허우는 중국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이자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중국군에서 가장 막강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쉬는 시진핑이 단행하고 있는 정치적 숙청 과정에서 이미 낙마했다. 쉬는 중국군 역사상 부패 혐의로 낙마한 인사들 중에 최고위급이었다. 시진핑은 반부패 운동을 통해 충성심이 의심스러운 모든 관리들, 특히 장쩌민(江澤民) 전 중국공산당 총서기의 심복들을 체계적으로 숙청하고 있다.

장옌융은 쉬에 대해 “그 정도로 부패하고, 비열하고, 거짓말과 속임수에 능한 사람은 중국에 없을 것”이라면서, “나라 전체 상황이 그렇다. 당국은 돈, 권력으로 타락했다”고 말했다.

쉬차이허우는 1989년 톈안먼 학살 이후 권력을 잡은 장쩌민 전 주석이 발탁한 인물로, 장쩌민의 군부 심복으로 꼽힌다.

장옌융은 인터뷰에서, 자신의 멘토이자 삼촌인 화이웨이가 쉬차이허우 때문에 리시융 밑에서 일한 군의관들이 마구 자행한 장기적출을 폭로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장옌융의 증언에 따르면, 리시융은 외과 의사로 자격증을 위조해 ‘로켓처럼’ 진급했고, 끈질긴 정치공작으로 결국 인민해방군 총병원의 간이식센터장이 됐다.

화이웨이는 리쉬융이 직권 남용에 대한 조사를 받도록 애를 썼지만, 쉬차이허우가 리의 뒤를 봐주면서 화이의 노력은 허사로 돌아갔다.

홍콩 케이블 TV는 방송에서 기자들이 베이징의 301군병원(인민해방군 총병원)에서 리쉬융과 대면해 입씨름하는 영상을 보여줬다. 장소의 민감성을 고려해볼 때, 기자들이 어떻게 병원 안으로 들어갔는지는 분명치 않다. 영상에서 리쉬용은 기자들을 밀치며 “여긴 군병원이다. 당신들은 질문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장옌융의 발언에 공산당의 정치 목적이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그의 진술은 지금까지 중국군 의료 체계가 저지른 장기적출 사실을 인정한 중국 고위 군전문의의 발언 가운데 가장 명백했다.

하지만, 장옌융의 발언에서 불법 장기적출 행위는 대부분 몇몇 사람들의 세부적인 범죄행위로 국한된다. 리시융과 그의 정치적 보호자인 쉬차이허우, 그들은 이미 숙청됐다. 그의 폭로가 사형수들과 (장옌융이 언급하지 않은) 양심수 장기 적출에서 중국군의 더 넓은 조직적 역할을 덮어 감추려는 시도인지는 분명치 않다.

BBC, 중공 생체장기적출 보도



지난 4월 30일 영국 BBC가 ‘중국에서의 생체장기적출(Organ harvesting in China)’이라는 제목의 관련 내용을 보도했다. (BBC 해당 방송사이트 화면캡쳐)

영국 BBC는 4월 30일 ‘중국에서의 생체장기적출(Organ harvesting in China)’이라는 제목으로 관련 내용을 보도했다. 이 프로그램은 최근 전 세계 의학계와 법조계 인사들이 중공 전 위생부 부부장 황제푸(黄洁夫)에게 시드니 대학의 명예교수직을 수여하는 것을 반대하는 서명에 대해 토론하는 내용이었다.

프로그램은 시드니 대학 의학대학의 마리아 싱어 교수를 취재했고 ‘핏빛 장기적출’의 저자인 데이비드 킬고어 전 캐나다 국무장관을 방송국으로 초청해 대화를 나누었다. 킬고어는 “황제푸는 직접 간 이식수술을 했으며 모처에 전화를 걸어 두 개의 간을 요구했는데 이것은 두 명을 살해했음을 의미한다”고 소개했다.

마리아 싱어 교수에 따르면 황제푸는 1987년 시드니 대학에서 외과의사로 장기 이식 기술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그 후 중국으로 돌아가 중국의 장기이식시스템을 관리 감독했다. 이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사형수의 장기로 운영됐는데 황제푸는 90~95%에 이르는 장기는 사형수의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현재 중국과 이란을 제외하고 사형수의 몸에서 얻은 장기가 도덕적이라고 여기는 국가는 없다.

킬고어는 마리아 싱거 의사의 호소문에 서명했다고 말했다. 서명 이유에 대해 그는 “호소문내용처럼 어떤 지역의 대학도 반인류 범죄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사람에게 영예를 안기는 것은 부적당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킬고어에 따르면 중국 언론은 이식 장기 출처가 사형수의 신체라고 공개했지만 실제 장기 때문에 살해된 많은 사람은 파룬궁 수련자다. 그들은 어떤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지만 경찰의 서명 하나로 노동교양소에서 3~4년간 감금돼 있는데 이 같은 사실을 언급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들은 매일 15시간 이상 일해야 하고 수감자 중에 파룬궁 수련자만 3개월에 한 번씩 의사에게 신체검사를 받고 실험실에서 화학 검사도 받지만 그들 자신도 왜 신체검사를 받아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들이 신체검사를 받는 이유는 그들의 장기가 어떤 상태인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라고 했다. 장기 이식을 위해 어떤 사람이 런던이나 캐나다에서 오면 그 사람과 장기가 맞는 수련자는 살해되고 그들의 장기는 항공편으로 상하이로 운반된다. 장기이식을 위해 온 사람은 새로운 간과 심장을 얻게 된다.




데이비드 킬고어는 데이비드 메이터스(David Matas)와 함께 이 부문에 관해 조사를 해왔는데 두 사람은 2005년까지 5년 동안 중국에서 이뤄진 장기 이식 수는 4만 1500건으로 생체 적출된 파룬궁 수련자 장기를 계산해야만 이 숫자를 설명할 수 있다고 했다. 또 2008년까지 10년간 6만 5000건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람들은 장기가 적출된 사람들은 모두 무고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고 말했다.

킬고어는 황제푸의 범죄행위를 언급했다. 황제푸는 2005년 9월에 간 이식 테스트 실험을 했을 뿐만 아니라 모처에 전화해 다른 예비용 간 두 개를 요구했다. 이것은 이 때문에 두 사람이 살해됐음을 의미한다. 킬고어는 이런 사람이 서방대학의 영예를 얻을 만한 자격이 있는지 여부는 모두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황제푸는 중국은 앞으로 3~5년 내에 사형수의 장기를 이용하는 것을 중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킬고어는 “중공은 13년 동안 수만 명의 사람을 살해했다. 이 사업은 막대한 이익을 취할 수 있었는데 사람 한 명의 가격은 50만 파운드로 황제푸 같은 의사들은 떼돈을 벌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황제푸는 국가장기약탈 집행자

전 중공 위생부 부부장 황제푸는 2013년 2월 25일 ‘인체 장기 기부 화상 회의’에서 다시 한 번 “중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사형수의 장기를 이용하는 국가다”라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우리의 이식 수술 의사들은 결국 광명정대하게 큰 무대에서 재능을 펼칠 수 있게 됐다”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황제푸는 아울러 ‘국제적 적대 세력’이 사형수의 장기 이용 문제를 확대하고 있다고 질책했으며, 또 국제사회가 중국의 장기 이식에 대해 반대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에 대해 비난했다.

프랑스 RFI의 보도에 따르면 황제푸가 비난한 ‘국제적 적대 세력’과 중국의 장기 이식에 대해 반대하는 태도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의학 전문 잡지인 ‘더란셋(The Lancet)’이 2011년 중국 사형수 장기 문제에 대해 언급하면서 호소한 것이다.

그 호소 내용은 “국제학술회의에서 중국 출처의 관련 논문 접수를 거부하고” “심사 간행물에서 중국 출처의 관련 논문 발표를 거부하며” “국제의학계는 반드시 이런 장기 이식 연구에 대해 중국과의 협력을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1달이 채 안 돼 열린 중공 양회(兩會)에서 황제푸는 위생부 부부장 직에서 면직됐다. 해외 분석가는 중공 위생부의 장기 이식에 관한 대변인인 황제푸를 면직한 것은 중공이 국가기구를 이용해 대규모로 파룬궁 수련자의 생체장기적출을 강행한 검은 내막과 관련 있다고 지적했다.

황제푸는 장쩌민의 측근 리창춘이 광둥(廣東)에서 재직할 때 중산의과대학 총장이었으며 당위원회 서기와 제1병원 원장을 겸직하면서 생체장기적출과 관련해 많은 경험을 쌓았다. 이를 통해 그는 위생부 내에서 국가장기약탈의 선도자가 됐다. 정부 발표에 따르면 간 이식이 전문이었던 황제푸는 국내에서 180여 편의 학술 논문을 발표했고 8개의 성급, 부급 과학연구 성과상을 수상했다.

원문링크(中文) http://www.epochtimes.com/gb/13/5/3/n3861255.htm

배경설명

파룬궁(法輪功-Falun Gong, 法輪大法-FalunDafa: 파룬따파로 불려짐)은 우주의 특성 진(眞), 선(善), 인(忍)을 근본으로 하는 심신수련법이다. 연공동작은 동공(動功)과 정공(靜功)으로 이루어진 5장 공법(功法)이 있으며 수련지침서, 『전법륜(轉法輪)』을 바탕으로한 심성수련을 중요시한다. 파룬궁은 중국 전통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전세계 80여개국에서 수련하고 있다. 중국정부통계에 의하면 1999년 당시 1억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중국에서 수련하고 있었으며 중국 前주석 장쩌민은 1999년 7월 파룬궁 수련을 금지시켰다.(자료) 그로부터 장쩌민과 일부 추종자들은 파룬궁 수련생들을 투옥하고 고문, 살해하면서 국민들 사이에 수련을 반대하는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서 파룬궁 비방선전을 강화하였다. 파룬따파 정보센터(FDI)는 1999년 중국에서 파룬궁 탄압을 시작한 이래 2978명의 사망자 신원을 확인했다.(자료) 그러나 2001년 중국 내부의 정부관리는 실제 사망자 통계를 1600명으로 보고했다. 전문가 자료에 의하면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십만 명이 투옥되고 10만 명 이상이 재판도 없이 강제노동소로 보내졌다.(자료)





파룬궁은 어떠한 공식 조직이나 재산, 직책이 없는 평화적인 심신수련법임에도 불구하고, 장쩌민은 1999년 7월 20일 중국에서 수련을 금지시켰다. 그 결과 5년 동안 수백만의 중국 국민이 폭력적인 탄압을 당하게 되었다. 왜 장쩌민은 지난 몇 년 간의 탄압을 지시했는가?
중국전문가와 대부분의 분석가들은 파룬궁 박해에 관하여 세가지 부당한 이유가 있다고 한다.

1. 수련의 대중성: 파룬궁 수련생의 수가 공산당원 수를 능가한다.

92년 5월 13일 처음 파룬궁이 소개된 이후, 중국정부는 98년 말까지 수련생수가 7000만에서 1억에 달한다고 추산하였다. 파룬궁은 중국에서 "가장 큰 자율단체가 되었으며 공산당 보다 거대하다"(U.S. News and World Report February 1999 issue)

2. 당 지도자는 정치적인 목적에서 파룬궁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중국에서 경제, 기술적인 발전이 최고 우선순위가 됨에 따라 정치선동과 이념전쟁의 전문 관리들은 정치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구실로 사회불안을 조성하게 된다. 파룬궁은 이러한 목적 아래 속죄양이 되었다.

99년 4월부터 파룬궁과 그의 창시자를 비방하는 선전이 관영매체를 통하여 시작되었고, 4월 23일 톈진(天津)에서는 경찰을 동원한 물리적 폭력을 사용함으로써 파룬궁 탄압을 가속화시켰다.

그러나 실제로 중국정부는 96년부터 파룬궁 탄압을 점차 강화하여 왔다.

3. 1인1당 독재자의 망상:
장쩌민은 파룬궁 배후에 정치 라이벌이 숨어있다는 의심을 하였으며 정치적 완력으로 박해를 진행하였다.

1999년 4월 25일, 베이징 푸유가(府右街)에서 1만여 명 이상의 파룬궁 수련생들이 중국정부 청원실 앞에서 평화적인 집회를 열었다. 그들은 이틀전 톈진경찰에게 불법적으로 구금된 45명의 수련생에 대한 석방을 요구했다. 중국의 주룽지 총리는 수련생들을 접견하였고 사태는 평화적으로 해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쩌민은 파룬궁 배후에는 공산당 고위간부가 숨어있으며 그는 자신의 정치적 라이벌이라고 언급한 문서를 정부관리들에게 돌리도록 지시하였다.

결과적으로 장쩌민은 파룬궁을 근절이 자신의 정치력을 유지하는 능력이라는 공식을 세우고 탄압을 시작한 것이

CNN의 윌리 램은 공산당 원로가 제공한 분석을 보도했다:

"장쩌민은 (파룬궁에 대하여) 마오쩌둥 스타일의 운동을 재현하여 원로 당 간부들에게 자신의 계파세력이 되어 충성을 맹세할 것을 강요하였다. 이것은 장쩌민의 권위를 높이고, 내년의 중대한 16회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그가 독재를 가능하게 할 충분한 힘을 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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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파룬궁을 탄압하는가?-





1999년 4월 25일, 베이징 푸유가(府右街)에서 1만여 명 이상의 파룬궁 수련생들이 중국정부 청원실에 청원하는 평화적인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이틀전 톈진 경찰에게 불법적으로 구금된 45명의 수련생에 대한 석방을 요구했다.

이는 즉시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푸유가(府右街) 오른편에는 공산당 지도자들의 공관, 중난하이(中南海)가 위치해 있었으므로 수많은 수련생들이 중국 지도자의 관저를 에워싼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나중에 파룬궁 탄압을 정당화하는 주요 구실이 되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탄압의 직접적인 이유로 잘못 알려지게 되었다.

4.25 사건의 원인은? 탄압의 이유는?
이 기사는 이러한 주요 질문에 대하여 가능한 답변을 찾고 있다. 그것은 장쩌민이 파룬궁을 탄압하기로 결정할 때 발행한 두 개의 비밀문서에 포함되어 있다.(공산당 고위간부에 의해 최근 밝혀진 정보에 근거) 이 문서들에는 장쩌민이 단호하게 언급한 내용이 있으며 파룬궁에 대하여 가장 자주 묻는 질문, "왜 중국 정부가 이것을 하고 있는가?" 를 심층적으로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참조가 될 것이다.

4월 25일 사건에 대한 오해

1999년 4월 25일, 파룬궁 사건은 보통 알고 있듯이 중국정부를 놀라게 한 갑작스런 돌발사건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중국정부가 주장하듯이 중국지도자 공관을 포위했다거나 일종의 정치적 시위도 아니었다. 1996년 6월 광명일보(光明日報) 논필 공격 사건으로부터 1999년 4월 톈진에서의 폭력사용과 경찰 동원에 이르기까지 실제로 파룬궁 탄압은 3~4년 전부터 강화되고 있었다.

대중적인 파룬궁 전파

파룬궁은 전통적인 중국 수련체계다. 1992년 5월 13일 창시인 리훙즈(李洪志) 선생이 처음으로 대중에게 전파하기 시작했다. 초기 4년 동안 중국정부는 적극 수련을 권장했다. 왜냐하면 파룬궁이 수련자들의 건강증진에 기여하여 정부의 의료비 절감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중국기공과학 연구회와 공안국을 포함한 많은 정부기관에서 파룬궁과 리(李)선생에게 상장을 수여하고 공로를 인정했다.

파룬궁이 공식적인 조직은 없었지만 입소문을 통하여 수 많은 사람들이 수련하여 몇 년만에 수백만에 달했다. 1999년 초, 중국정부 통계에 의하면 중국전역에서 적어도 7000만 이상의 사람들이 수련하고 있었다. 파룬궁은 "중국에서 가장 큰 자율단체가 되었으며 심지어 공산당보다 거대하다" 라고 1999년 2월 판 US뉴스와 월드 리포트에서 언급하고 있다.

파룬궁 탄압의 강화

1970년대 말,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중국의 관심은 정치선전에서 경제,기술적인 발전으로 옮겨갔다. 이러한 정세변화는 정치선전과 이념전쟁에 전문적인 사람들에게 정치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감소시켰다. 정부가 필요로 하는 기구로 살아남기 위하여 이러한 사람들은 전형적으로, 정치적인 힘을 얻는 '구실'을 제공하는 정치'불안'에 의존하게 된다.파룬궁의 급속한 발전은 중앙정부 모종의 부서에 보고 되었고, '파룬궁'이 바로 그들이 필요했던 것이라고 결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람들은 1996년 6월부터 관영언론매체를 통하여 파룬궁과 그의 창시자를 비방하기 위해 부정적인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1996년 7월 24일, 중국 언론 보도국에서는 전국적으로 파룬궁 출판물의 배포를 금지시켰다. 1997년 초, 중국 국가 안전국에서는 파룬궁을 사교로 규정하는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전국적인 조사를 시작했다. 조사는 '증거 없음'으로 조속히 끝났다. 1998년 공안국에서는 다시 조사를 지시한바, 전국적으로 많은 파룬궁 수련생이 지방 공안국에 의해 불법적인 학대를 받게 되었다. 1999년 4월 23일, 공안국은 파룬궁에 대하여 모욕적인 기사를 출판한 톈진의 모 잡지에 유감을 표시한 사람들을 체포하고 구타하도록 지시했다.

1999년 4월 24일, 톈진의 파룬궁 수련생들이 불법으로 구금된 수련생의 석방을 요구하자 톈진 정부관리는 이 사건이 중국 공안국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베이징의 허가 없이는 석방할 수 없다고 했다. 간단히 말해서, 파룬궁 수련생들은 베이징에 있는 정부 민원청원실에 청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파룬궁 수련생들은 베이징 정부 청원실에 가서 톈진에 감금된 수련생의 석방을 요청하였다. 이 와중에 4.25사건이 유발된 것이다.

장쩌민의 제2인자, 행정수반 주룽지 총리가 수련생들을 만나러 나온 후, 상황은 부드럽게 해결되었고 정부와 수련생이 납득할 수 있게 해결되었다. 전반적인 과정이 평화로웠고 질서정연했으며 모든 수련생은 주총리가 문제를 해결하는 동안 청원소 밖에서 조용히 침묵했다.
그렇다면 왜 탄압하는가?

1999년 4월 25일 다음날 아침 수천명의 파룬궁 수련생들이 진심으로 주룽지 총리를 환호하였다. 그러나 장쩌민은 이 사건에 대해 완전히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4월 25일 저녁 '상임위원회의 정치국과 기타 관련 지도자 동지에게 보내는 장쩌민 동지의 서신' 이라는 제목의 서신에서 장쩌민은, 배후에서 주도하고 지시하는 당내부의 '지도자'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물으며 파룬궁을 사교로 규정했다. 이와 같이 장쩌민은, 이 사건은 당내부에 그를 대적하는 적이 있는 것을 뜻한다는 의심을 분명히 했다.

분명히 장쩌민은 4월 25일 서신에 지적한 대로 당의 직접적인 통제에 있지 않은 "아주 많은 공산당원, 서기관, 지식인 뿐만이 아니라, 노동자, 농민 및 군인이 포함된 사회적 단체(파룬궁)"을 허용할 수 없었다. 특히 당내에 그의 정치적 라이벌 중의 한 '지도자'에 의해 움직일 수 있는 거대한 단체의 막강한 힘에 위협을 느꼈다.

장쩌민은 탄압정책을 완전히 발전시켜 "중앙위원회 정치국 회의에서 장쩌민 동지의 파룬궁 문제에 대한 지체없는 해결처리"라는, 7월 제7번 서신에서 그의 파룬궁에 대한 견해를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물론 리훙즈와 같은 일개인은 많은 권력이 없다. 파룬궁 문제는 깊은 정치적 배경이 있다"고 장쩌민은 서신에 적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4.25사건은 "1989년 정치폭동이래 가장 심각한 사건"이며 "효과적인 대처"를 해야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었다.
'1989 정치폭동'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기억하듯이 중국공산당 지도자 자오쯔양(趙紫陽)은 톈안먼 광장에서 단식투쟁하는 학생을 접견한 일 때문에 장쩌민에게 밀려났다. 장쩌민은, 주룽지 총리가 정부 청원소 밖에서 파룬궁 수련생을 만났다는 이유로 정치국 의원들 앞에서 자아비판을 해야만 된다고 말하며 '1989 정치폭동'과 같은 유사한 압력을 주었다.

장쩌민의 서신은 당내의 정적에게 이용하는 도구이고, 파룬궁이라는 견해를 분명히 나타냈으며, 어떻게 확실한 증거도 없이 파룬궁을 탄압하기로 결정했는지 잘 보여준다.

"정치국 임원 다수가 장이 잘못된 정책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고 CNN리포터 윌리 램이 말했다. 그는 장이 마오쩌둥 스타일의 운동으로 원로 동지들에게 그의 계열로 충성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고 원로당원의 말을 인용했다. "이것은 장쩌민의 권위를 높이고, 내년의 중대한 16회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그가 독재를 가능하게 할 충분한 힘을 주게 될 것이다."

1999년 7월 장쩌민에 의해 박해가 실시된 이래 수만 명의 무고한 중국국민이 파룬궁을 수련한다고 감금되었다. 수천 명이 고문받고, 재판도 없이 노동교양소로 보내지거나 불법적으로 정신병원에 수용되었고, 수백만 명이 직장과 가정을 잃었거나 학교에서 추방되었다. 장쩌민의 단기적인 파룬궁의 탄압은 농부, 학교, 사업가 및 공무원 군인 등을 포함한 중국사회의 커다란 부분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탄압의 진정한 비극은 중국 국민에 대한 심각한 영향뿐만이 아니라, 사실은 파룬궁에 대한 탄압이 그것을 수련하는 사람들의 특성이나 수련 내용에 해당되는 것이 조금도 없다는 사실에 있다. 파룬궁은 단순히 권력투쟁의 손아귀 속에서 볼모로 이용당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파룬궁은 중국의 복잡한 정치권력환경의 희생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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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파룬궁을 탄압하는 배경에 대한 역사, 사회 및 정치적 분석


1999년 7월 27일 인민일보 발행기사와 기타 여러 공식 논평에 따르면, 파룬궁과 공산주의 체제 사이의 모순이 당 지도자들에게는 유신론과 무신론, 미신과 과학, 그리고 유심론과 유물론의 갈등으로 보였다. 이러한 이분법적인 논리는 사실 극히 부정확하다. 여하튼 그것과는 관계없이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문제만이 파룬궁을 탄압한 진실한 이유는 아니었다. 파룬궁은 미신이나 유물론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으며 결코 공산당을 반대하지 않는다. 만약 파룬궁이 공산주의나 정부에 ‘대항’했다면, 이는 수백만 명의 파룬궁 수련생이 스스로 그들 자신들에게 대항한 셈이 된다. 왜냐하면 파룬궁 수련생들 중에서 수백만 명은 파룬궁을 박해하기 전에 중국 공산당원이었으며 고위급 인사들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문제는 파룬궁 수련생들이 중국 중앙정부에 보내는 “1만 자(字) 서신”에 잘 설명되어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중국 공산당의 파룬궁 탄압 배경에 대한 여러 가지 이유를 설명하겠다.

역사적 배경


파룬궁을 ‘사이비 종교’로 규정한 것은 단순히 파룬궁을 제거하려는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공산당 고위 간부들의 많은 친척들이 파룬궁 수련생들이었다. 리훙즈(李洪志) 선생은 수년간 공개적으로 대중들에게 강의해 왔으며, 대중들은 파룬궁이 사회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해 왔다. 공안부에서는 파룬궁을 수년간 조사해왔지만 공안부의 간부는 보고서에서 파룬궁은 어떠한 위험한 일도 하지 않으며 국법을 위반하는 행위도 없다고 명백하게 보고 했다. 어떤 간부들은 파룬궁 수련생들이 어떻게 하면 그렇게 확고하게 수련을 해 나갈 수 있는지 조사하는 과정에서 파룬궁을 직접 배우게 되었다. 어떻게 공안부에서 파룬궁이 올바르고 정직한 기공단체라는 것을 모를 수가 있는가?


어떻게 그들이 리훙즈 선생이 세인들에게 높은 도덕을 함양한 착한 시민이 되라고 가르친 것을 모를 수 있는가? 어떻게 그들이 리훙즈 선생이 반복적으로 수련생들에게 국가 정치에 간섭하지 말고 어떠한 법률도 어기지 말라고 이야기 한 것을 모를 수 있단 말인가? 공안당국의 집단적인 기억력 상실증은 고도의 전략인 것처럼 보인다.


파룬궁을 탄압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파룬궁 수련생들이 매우 큰 단체이기 때문에 그들을 신뢰하지 않는 점이다. 중국이 매우 큰 단체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역사적으로 선례가 있으며, 아마 우리는 역사적 요인을 생각할 수 있다. 중국 국민들은 그들의 역사를 매우 잘 알고 있다. 불과 1, 2백 년 전에 중국에는 역사적인 2개의 반란이 있었다. 하나는 의화단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태평천국의 난인데, 각 사건은 카리스마적인 종교형태로 시작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전통적인 관념이 중국 사람들의 마음 한 구석에 여전히 자리 잡고 있다. 전도유망한 파룬궁의 짧은 역사가 시작되었다가 지나갔으며, 이러한 점은 파룬궁을 시기하는 사람들을 걱정스럽게 하였다. 중국에 있어서 지난 100년간은 유혈 충돌과 불안정한 시기였으며, 국가내부의 잔인한 권력다툼으로 인하여 역사의식이 ! 확고한 많은 시민들은 자비심을 중시하는 단체를 회의적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파룬궁의 원리와 행동에 관하여 알게 되면 그러한 역사적 사고가 가당치 않은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파룬궁을 사회, 역사적인 맥락에서 벗어나 고찰해보면 이 대중적 수련은 예전의 것과 완전히 다른 것임을 알게 된다. 이 점은 파룬궁 수련자들뿐만 아니라 그의 스승과 가르침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파룬궁은 중국 대륙에서 한 가지 용납될 수 없는 잘못을 범했으니, 즉 1999년 초, 파룬궁 수련자의 수가 마침 공산당원의 숫자를 초과하였던 것이다. 중국정부가 후원하는 인구조사에서 공산당원의 수는 단지 6천만 명이었는데 파룬궁 수련자의 수는 7천만 내지 1억 명으로 추산되었다. 파룬궁 수련자들은 기공을 연마하기 위하여 보통 매일 2~3시간씩 공원에 함께 모인다. 반면에 모범적인 공산당원이라도 한 달 내내 한 번 정도 당 집회에 참석해서 2시간쯤 있을 뿐이다. 그들의 당원자격은 어떠한 사회적 특권을 누리기 위한 형식에 불과하다. 만약 파룬궁이 어떠한 정치적 실체라면 중국정부 관리의 우려를 이해할 만도 할 것이다. 중국 공안국은 여러 차례 조사과정에서 많은 수련자들이 당원이나 정부관리임을 알았다. 그래서 중국 공산당은 파룬궁이 ! 그들에게서 “인민을 빼앗아 갔다.”고 믿었다. 관리들은 역사적인 사고(思考)에 얽매여 이와 같은 대규모 단체가 정치적인 것이 아닌 다른 포부를 가진다고 상상할 수 없었다.


파룬궁을 연마하는 인민들이 많아졌지만, 대부분의 수련자들은 높은 도덕수준을 지닌 돋보이는 시민들이다. 만약 어떤 사회적인 영향력이 존재한다면, 그들은 사회적인 안정을 지탱하는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셈이다. 파룬궁의 리훙즈 선생은 수련자들이 파룬궁을 정치적인 문제에 연루시켜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말했다. 파룬궁은 정치적인 수단이 아니라 대개 개인의 자기 수련을 통하여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한다. 공산당은 왜 파룬궁을 반대해야만 하는가?


이는 그들이 이 세상에서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거나 권력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파룬궁은 현재에도 미래에도 결코 정치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는 리(李)선생의 거듭된 해명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은 만약 정부가 파룬궁 수련을 계속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면 파룬궁은 정부에 대항하는 강력한 세력을 형성할 것이라는 관념에 사로잡혔다.


사회적 배경


현재 중국의 사회적 곤경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중국은 현재 직면한 사회의 모든 면에서 믿기 힘든 변화를 겪고 있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자생한 가치관이나 근본적으로 상이한 사회집단이 매일 중국으로 밀려옴에 따라 “가치관의 위기”가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가치관과 사상의 유입을 저지하는데 적절한 것은 거의 없다. 중국은 문화대혁명(1966-1976)을 통해 뿌리 깊은 전통문화가 쇠퇴함에 따라 온갖 새로운 종류의 문제들이 드러나고 있다. 현재의 상황에 대한 불평, 불만과 퇴폐가 다수에게 보편화되고 있다. 이러한 논점들은 본 평론의 범위를 훨씬 벗어나는 것이고 중국의 정치적인 리더십이 이들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는 매우 불확실하다고 말하는 것으로 족하다.


파룬궁은 어느 정도 이들 긴장상태 중에 있으며 어떤 이기적인 중국 공산당 관료들은 이를 이용해 왔다. 그 중에서도 특히 파룬궁은 전통적인 중국의 수련법(기공, 태극권 등)과 현대 서양과학 및 생물의학의 교차점에 있다. 수 천년동안 중국은 침술, 한약, 기공과 같은 전통적인 치료법을 가지고 있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 전통 치료법의 관점이 인간의 생명, 자연, 우주와 그들의 상호 관계에 관한 깊은 이해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문화대혁명 기간 중 이들 기술은 ‘미신’, ‘사기’, ‘퇴보’, ‘비과학’이라거나 심지어 '창피스러운 것'이라는 딱지가 붙어 매도되었다.


비록 중국정부가 지난 20년간 의료계의 막대한 부담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이러한 수련을 장려했지만 이들 전통 기술의 품위는 결코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러한 딱지는 타인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한 어떠한 정치적 목적이 있을 때 다시금 끌려나와 휘둘려지게 된다. 작금 중국에서는 생물의학과 같은 서구과학이 전통적인 기술에 비하면 “현대적”이고 ‘진보적’인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그러한 뒤집어씌우기는 쉽게 달성할 수 있다. 따라서 중국의 언론매체가 지난 5년간 파룬궁을 ‘미신’이라거나 ‘봉건주의’로의 회귀라고 비난하는 수많은 이야기는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또한 많은 파룬궁 수련자가 의학적인 치료를 중지함에 따라 어떤 사람들은 파룬궁이 현대과학 및 의술과 상치되는 것이라고 시사했다. 동시에 아이러니컬하게도 많은 강경노선당원들 - 그들! 중 몇몇은 중국의 저명한 과학자이다 - 은 아직도 마오쩌둥 사상과 마르크스주의가 물리학이나 화학과 유사한 ‘자연과학’이라고 믿고 있다. 파룬궁 수련자들 중에는 저명한 과학자들이 많기 때문에 그러한 수사(修辭)가 주목을 끌지 못하거나 문제없이 통과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에서는 과학자들조차 정치적 부담을 안고 있는 존재가 되었다. 많은 ‘소문난’ 과학자들은 개인의 영달을 위해 정치적 세력과 결탁하여 파룬궁을 공격했다. 그래서 우리는 파룬궁에 대한 정치운동이 ‘과학적 성과’로 선전된 것임을 증언한다.


중국 지도자들은 1999년을 ‘도전과 기회의 해’라고 말하기 좋아하지만, 그 ‘도전’ 부분은 정부가 주도했던 것이다. 경제성장은 삐꺽거리며 정지상태가 되었고 많은 지도자들은 우려를 나타냈다. 성 정부가 보유한 대부분의 기업들은 끊임없이 손실을 보고 있으며 현재 다수는 파산에 직면하고 있다. 실업은 하늘 높이 치솟고, 빈부의 격차는 극단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계층간의 긴장은 뚜렷한 형태로 떠오르고 있는데 예전에는 이와 같은 것이 없었다.


실업자들의 데모는 거의 매일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전국적인 문제로 발전하여 점점 통제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새롭고 가혹한 보건문제를 조성하고 있다. 도덕의 타락은 이마도 수 년 이래 최고조에 달하고 있으며, 이들 문제들은 결국 중국의 정치상황에서 쟁점이 된다.


정치적인 문제


정치적으로, 오늘날의 중국은 경제와 기술발전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경제, 기술 그리고 경영에 전문식견을 갖고 있는 자들을 위해 정치포럼이 개설되어 있다. 이념에 대한 정치선전활동과 투쟁을 전문적으로 하는 자들은 이미 정치 발전에 기여할 기회를 상실했다. 그러나 이런 많은 사람들은 지금까지 공산당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안정되고 평화로우며 번영하는 중국은 그들이 한때 누렸던 강력한 정치적인 입지를 지킬 기회를 별로 주지 않는다. 한때 그들이 누렸던 입지는 바로 정치운동을 하는 것이 당의 초점이었을 때이다. 필요한 정부 통치 부서에 남기 위해서 이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정치불안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그들은 사실상 불안을 일으키기 위해 열심히 일해 왔다. 그리고 파룬궁이야말로 그들이 필요했던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이들은 경찰관들을 시켜 파룬궁 수련자들을 지방에서부터 괴롭힘으로써 사업에 착수했다. 다음으로 그들은 파룬궁과 그 스승의 명예를 실추시킬 증거를 조작하여 관영신문들과 TV를 통해 공개적으로 부정적인 면을 유포하였다. 이윽고 텐진(天津)시 사건처럼 그런 관영신문 편집인들에게 자신의 의견를 표명했던 사람들을 경찰들을 시켜 구타, 체포하게 하였다.

수련자들이 중난하이(中南海)에 있는 중앙정부에 가서 체포한 사람들을 석방하라고 청원하자, 그들을 방송을 통해 심하게 왜곡시켜 의심할 여지없이 중국지도자 관저에 공격을 가하는 모습으로 비춰지게 했다. 중난하이 사건 당시, 그런 이기적인 당원들은 중국 최고위층에게 겁을 주어 그들이 이러한 정치 전문가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키는데 성공하였다. 중난하이 집회의 평화적인 해결(주룽지 총리의 친절한 중재로 용이하게)은 이런 정치음모자들을 실망시켰다. 그러나 중국에게는 불행하게도 공산당 총서기이기도한 장쩌민 주석은 그의 권력이 이 큰 단체에 의해 위협받는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 모든 음모를 꾸몄던 자들은 다시 한번 중국 정치마당의 중앙무대를 누비면서 반(反)파룬궁 캠페인을 무서운 속도로 몰아부치고 있다. 그들 또한 자신들이 그들의 정적을 해칠! 기회를 즐기고 있음을 알고 있다. 분명 파룬궁은 중국에서 가능한 모든 방법을 통해 정치적인 목적에 관여할 수 있다고 잘못 해석되어 왔다.


한 가지 주목할 중요한 것은 이기주의가 시종일관 다음과 같은 문제, 두려움이라는 매우 강력한 것과 얽혀있다는 사실이다. 인민일보의 한 사설에서 정부는 파룬궁이 인민을 위해 자신들과 싸우고 있다고 믿고 있으며, 파룬궁은 당과 주요 부서를 포함하는 정치 기관들 속에 이미 침투되었다는 논평이 있었음을 상기해보자. 중국전연대 각료인 왕 자오구오와 중국 부주석 후진타오는 파룬궁이 창시되어 침투했다는 단정을, 즉 중국인민들을 위해서 당과 정쟁을 하겠다는 뜻으로 믿고 있다.


자주 연관되는 것은 아니지만, 당원들의 편집증(일종의 정신병)을 몰고 오는 많은 현상들이 파룬궁 주변에 있다는 것이다. 천안문 민주화 운동 10주년에 의견을 달리하는 정치인들은 1990년 전보다 더 적극적이었고, 반대 정당을 조직하려 했다. 티벳인들 뿐만 아니라 신장(新疆)의 소수민족 집단들은 독립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대만이 또한 독립적인 지위의 목소리 내고 있다. 더 큰 문제를 제기하는 일 없이 중국지도자들은 어떤 독립표현에 대해서도 인내심을 보이는 쪽을 선택해왔다.


그들은 우려를 표하기 보다는 강함을 보이는 쪽을 선택해 왔다. 이 때문에 더 큰 갈등을 유발시키지는 않았지만 이런 문제들에 대해 어느 것도 해결되지 못했다. 하지만 국가 건강을 회복하고 개인 입지를 높이려는 당 관리들은 갈등의 증폭이란 처방을 택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당 지도자들이 그런 정도로 우려하고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이는 유고슬라비아 주재 중국 대사관에 NATO의 우발적인 폭격과 그 여파의 가능성을 볼 필요가 없는 것과 같다. 중국 관영 매체들은 국가의 정체성과 응집력이라는 강한 의식을 자극할 기회로서 불행한 일을 움켜잡고 있다. 여러 가지 음모 이론과 미국이 이런 일을 ‘의도적으로’ 그리고 ‘악의적으로’ 했다는 주장은 무분별한 대중에게 먹혀들었다. 중국 관리들은 (아무튼 NATO와 동일시하는)미국을 희생양으로 삼고 중국 국수주의에 박차를 가할 기회? ?즐겼다.

파룬궁에 대한 당 관리들이 갖는 불안과 분열 간에 이런 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파룬궁이 금지되었던 같은 주에, 장쩌민 주석과 다른 고위 관리들이 ‘양국론’을 제기한 대만과 리덩후이(李登輝) 총통을 몹시 비난했던 사실을 기억할 수 있다. 리덩후이를 ‘사악한 인간’, ‘모든 중국 인민의 반역자’ 라고 부르면서 중국 선전 기관은 국혼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


결국 커다란 희생양을 만들기 위해 중국적인 것을 택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파룬궁이었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문제를 파룬궁이라는 희생양의 뒤에 두었다. 그렇게 할 때에 중국정부는 중국내부에 내재하는 위험스러운 존재-파룬궁-로부터 중국인민을 보호함으로써 영웅인척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왔다. ‘사회 질서’라는 이름으로 정부는 파룬궁을 무자비하게 박해하는 계책을 세우고 실행하였다. 이보다 더 아이러니 한 것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파룬궁은 아마도 중국의 일부 깊은 사회적인 비애에 대한 최선의 대안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파룬궁의 박해를 영웅적이고 숭고하며 필수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당은 그 끔찍한 행동들을 정당화시킬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증거를 조작 해온 셈이다. 중국 정보는 또한 남몰래 소수민족, 비공식 종교집단, 민주주의 옹호론? 湄湧?박해하는 일을 강화시켰다. 심지어 중국의 기공 학교에서 하는 수련조차도 이제는 공공장소에서 위법이 되었다. 이는 지도자들을 두렵게 하는 것은 파룬궁이 아니라 그들이 통제할 수 없는 어떤 일을 누군가가 하고 있는 사실이다.


이 모든 것은 당이 결정적인 문제들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음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당은 아마도 광범위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어떤 사회 집단이 존재한다는 것에 불안감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 존재가 아무리 자애롭거나 심지어 이로울 지라도 참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이 당이 바로 불안정이나 혹은 파룬궁 보다 더 크고 거론되지 못한 사회, 정치, 경제적 문제를 언급하는 것을 받아들 수 없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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